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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관련 공부/스포츠 사회학

브루디외의 문화자본(스포츠 사회학)

by spomin 2023. 4. 26.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참조: 노명우, 2004)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 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로 도래하지 않은 채 서구 선진국을 비롯한 산업국가들은 전례 없는 호황 속에 소비사회로 진입했다. 이런 현실에서는 생긴 관계의 모순을 자각하고 혁명에 투신하는 전통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미 모두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이 달라도 모두가 같은 TV프로그램을 시청하고, 같은 고급 매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면서 전통적 관점에서의 계급구분은 상당히 모호해졌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떻게 돈을 버는지 보다 어떻게 소비하는지, 무슨 일에 종사하는지 보다 무슨 여가를 즐기는지가 오히려 계급을 가르는 더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벌든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활양식과 기호를 소비하고 즐기는 방식의 차별화를 통해 계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변화된 사휘의 계층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생활양식과 같은 사회문화적 요소(문화자본)를 계급결정 요인으로 추가하고, 이를 화폐와 같은 경제자본과 교환할 수 있는 '자본'으로 다루었다. 그는 자본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는데, 스포츠는 이 도표에서 체현된 문화자본의 하나로 사회의 계층구조에 관여한다.

<브루디외의 자본 구분>

- 경제자본: 화폐나 소유권의 제도화된 형태로 즉각 전환 가능한 자본

- 체화된 문화자본: 어학, 스포츠 등 오랫동안 지속되는 정신과 신체의 성향 형태로 존재

- 객관화된 문화자본: 그림, 책, 사전, 악기, 등과 같은 문화상품의 형태로 존재

- 제도화된 문화자본: 자격증, 졸업장 등 교육적 성취의 형태로 객관화된 문화자본

- 사회자본: 혈연, 학연 등 지속적인 네트워크 혹은 상호 면식이나 인정이 제도화된 관계

 

자본으로의 상호 전환

우선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은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모두 '자본'으로 상호 전환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자본, 사회자본은 다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는 하지만 화폐나 소유권의 제도화된 형태로 전환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다니는 중견 간부에게 골프를 잘하는 능력(체현된 문화자본)은 축구를 잘하는 능력보다 기업 내 핵심 인사와 접촉(사회자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이는 승진과 같은 성취기회(경제자본)에 보다 근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자본유형 간 전환을 세대 간 상속에 적용해 보면, 스포츠와 같은 사회문화적 요소가 계층 재생산에 기여하는 효과를 알 수 있다. 흔히 사회에서 세대 간 자본의 상속이나 증여는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세율도 높을 뿐 아니라 사회적 저항도 크다. 그러나 영어나 스포츠 등 문화소양의 교육은 (돈이 있어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교환하는 행위임에도 상속이라고 저항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화자본을 자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자본의 지출을 통해 국제화된 행동양식을 갖추고, 고급스포츠를 체득한 개인은 다른 이보다 향후 어떤 형태로든 이 문화자본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경제자본으로서의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상류계급은 보다 은폐가 용이한 문화자본의 형태로 자본을 전환·상속하면서 계급위치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스포츠와 문화자본

요컨대, 부르디외는 스포츠를 계층구조에 개입하는 문화자본의 하나로 다룸으로써 경제결정론에 의해 밀려나 있거나, 또는 사회의 계층현상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스포츠의 역할을 규명한 성과를 갖는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전통적인 계급 개념보다 많은 사회문화적 요인을 고려했다고 해서 그를 계층 개념을 선호하는 기능론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갖가지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계층결정의 요인으로 다루면서도 경제자본으로의 전환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불평등의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경제적 요인들의 역할을 인정한 계급론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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